은행잎 아래 피어난 시

폐역에서 열린 가을 문학광장
2026년 10월의 마지막 날, 경북 의성군 단촌역이 문학과 음악, 주민의 이야기가 어우러지는 문화 공간으로 바뀌었다. 폐역된 역사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제8회 단촌역 은행나무 문학광장이 열렸다.
행사는 단촌면이 주최하고 단산문화센터와 단촌면주민자치회가 공동 주관했으며, 의성군립도서관이 후원했다. 단촌역은 폐역된 역사에 카페가 들어선 곳으로,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시기에 맞춰 해마다 시 낭송 행사가 펼쳐지는 문화 공간이다.
이날 역사 주변에는 시와 손글씨, 옛 사진과 생활 유물, 환경을 주제로 한 작품이 자리했다. 차 향이 은은하게 번지는 가운데 관람객들은 낭송에 귀를 기울였고, 공연이 이어질 때는 노래를 함께 부르며 가을 정취를 나눴다.
시인의 서명과 손글씨로 만난 문장
단촌 출신 김용락 시인은 자신의 시가 담긴 액자에 직접 서명해 행사 방문객들에게 나눠줬다. 시인의 작품과 서명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도록 마련된 프로그램이었다.
다른 체험 공간에서는 참가자가 좋아하는 짧은 글을 책갈피에 캘리그라피로 적어주는 행사가 진행됐다. 손으로 정성스럽게 쓴 문장이 작은 책갈피에 담기면서 문학을 일상에서 간직할 수 있는 작품으로 완성됐다.
커다란 나무 그림에는 주민과 방문객이 자신이 생각하는 단촌을 짧은 글로 남겼다. 현장에서는 그 가운데 일부를 함께 읽고 선물을 나눴다. 각기 다른 문장들은 하나의 나무 위에 모여 주민들이 바라보는 단촌의 모습과 마을에 대한 마음을 보여줬다.
옛 사진과 생활 도구가 전한 단촌의 시간
단촌작은도서관에서는 단촌의 과거를 살펴볼 수 있는 옛 사진 전시회가 열렸다. 문화원이 제공한 자료에는 1950년대 단촌면 후평국민학교의 모습과 주민들이 소풍을 갔던 장소, 전통 혼례 장면 등이 담겼다.
사진 주변에는 과거에 사용하던 다리미와 오래된 트렁크, 나무 지게 같은 생활 도구도 전시됐다. 학교와 혼례, 노동과 이동의 흔적을 담은 자료와 물건들은 단촌 주민들의 생활사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보여주는 기록물 역할을 했다.
단촌면주민자치회는 자랑스러운 군민상 수상의 기쁨을 주민들과 나누기 위한 손글씨 전시도 마련했다. 전시된 작품은 단촌작은도서관 수강생들이 직접 완성한 손글씨였다. 정성스럽게 적은 글귀들이 행사 공간을 채우며 문학광장의 성격을 한층 선명하게 드러냈다.
아이들이 참여한 흙과 씨앗 체험
어린이들과 함께하는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됐다. 참가자들은 진흙을 달걀 크기의 흙덩이로 빚어 판에 넣었다. 흙덩이 안에는 씨앗이 심어져 나무가 자라도록 구성됐다.
탄소중립 포스터 그리기 대회 수상작도 행사장에서 전시됐다. 아이들이 그림으로 표현한 환경과 탄소중립의 의미를 관람객들이 함께 살펴볼 수 있도록 한 자리였다. 흙과 씨앗을 직접 만지는 체험과 포스터 전시가 나란히 배치되면서 미래 세대가 바라보는 환경의 가치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초등학생들의 시로 연 문학 무대
공식 무대의 첫 순서는 단촌초등학교 학생들이 맡았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학생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담아 직접 쓴 시를 낭독했다.
어린이들의 목소리로 전해진 창작시는 이날 행사가 지역 주민과 미래 세대를 문학으로 연결하는 자리임을 보여줬다. 꾸밈없는 표현과 맑은 낭독이 이어지자 행사장은 밝고 따뜻한 분위기로 채워졌다.
관람객들은 차를 마시며 학생들의 시와 이어지는 낭송을 감상했다. 옛 기차역의 흔적과 노란 은행나무, 잔잔한 시어가 어우러지면서 단촌역은 열차가 아닌 사람과 이야기가 머무는 공간이 됐다.
기타 선율과 함께 깊어진 가을
박정미와 김종국은 기타를 연주하며 ‘가을 사랑’과 ‘잊혀진 계절’을 들려줬다. 익숙한 노래가 울려 퍼지자 행사장을 찾은 사람들도 입을 모아 따라 불렀다. 기타 선율과 합창은 시 낭송 중심의 무대에 음악적인 활기를 더했다.
노란 은행나무 풍경 앞에서는 한복 치마를 입은 낭송가가 도종환 시인의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를 낭송했다. 한복의 색감과 작품의 정서가 가을 풍경 속에서 함께 드러났다.
이 밖에도 ‘불길’, ‘세월이 가면’, ‘단촌역 은행나무’ 등의 시가 차례로 낭송됐다. 서로 다른 작품이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면서 단촌역의 옛 공간과 현재의 주민 문화가 자연스럽게 맞닿았다.
세촌리 주민들이 완성한 마지막 무대
행사의 마지막은 단촌면 세촌리 주민들이 준비한 숟가락 난타 공연이었다. 주민들은 마을 이야기를 직접 가사로 만들고, 이를 노래와 흥겨운 숟가락 난타로 표현했다.
공연 도중 작은 음향 문제가 발생했지만 주민들은 준비한 무대를 이어갔다. 힘찬 장단과 노랫말에는 세촌리의 이야기와 마을을 향한 주민들의 마음이 담겼다. 전문 공연이 아니라 주민 스스로 자신의 삶터를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문학광장의 취지와도 맞닿은 순서였다.
사람과 문화가 다시 모인 단촌역
단촌역은 과거 기차가 오가던 장소였지만, 이날만큼은 시를 읽고 노래를 부르며 마을의 기억을 나누는 광장이 됐다. 시인의 서명이 담긴 액자부터 책갈피 손글씨, 주민들이 남긴 단촌 이야기, 1950년대 사진과 옛 생활 도구까지 각 프로그램은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했다.
어린이들의 창작시와 환경 체험, 주민들의 손글씨와 숟가락 난타는 세대별 참여가 한 공간에서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줬다. 차와 시, 기타 연주와 노래가 더해진 현장에서는 관람객들이 서두르지 않고 무대를 지켜보며 가을의 여유를 나눴다.
제8회 단촌역 은행나무 문학광장은 폐역의 기억을 보존하면서도 주민이 직접 문화의 주체로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 하루였다. 노란 은행잎 아래 모인 시와 음악, 마을의 기록은 단촌역을 사람과 사람이 다시 만나는 문화 공간으로 채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