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숲과 왕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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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숲과 왕의 나무

9월 말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의 기청산식물원은 붉은 꽃무릇으로 깊은 가을빛을 드러낸다. 높게 자란 나무 아래로 꽃무릇 군락이 이어지고, 식물원에서 가장 큰 낙우송은 숲의 중심을 묵묵히 지킨다. 화려하게 다듬은 정원보다는 오랜 세월 식물이 뿌리내린 자연스러운 숲에 가까운 공간이다.

기청산식물원은 1969년 농원으로 출발해 반세기 넘게 우리 꽃과 나무를 수집하고 가꿔 온 곳이다. 약 9㏊의 부지에서 2,500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어 계절에 따라 서로 다른 숲의 표정을 만날 수 있다.

기청산에 담긴 뜻

기청산이라는 이름에는 식물원을 일군 뜻이 담겨 있다. 곡식을 고르는 도구인 키를 뜻하는 ‘기’에 ‘청산’을 더했다. 키질로 쭉정이를 걸러내고 알찬 곡식을 모으듯 좋은 꽃과 나무를 모아 푸른 산을 이루겠다는 의미다.

긴 세월 동안 식물을 모으고 키워 온 과정은 숲 곳곳에서 확인된다. 나무의 크기와 형태가 서로 다르고, 산책로 주변의 식물도 인위적으로 줄을 맞추기보다 자연스러운 숲의 흐름을 따라 자리한다.

숲길 따라 만나는 꽃무릇

매표소를 지나면 식물원 관련 영상을 볼 수 있는 의자가 마련돼 있다. 숲의 특성상 모기가 나타날 수 있어 현장에는 모기 기피제도 비치돼 있다. 영유아와 함께 방문한다면 연령에 맞는 기피제를 따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

영상 관람 공간을 지나 조금 더 걸으면 본격적인 탐방로가 시작된다. 탐방로는 대체로 평탄하게 정돈돼 있으며 구불구불한 길이 숲 안쪽으로 이어진다. 어린아이도 보호자와 함께 걸을 수 있고 유모차를 이용해 둘러보기에도 비교적 수월한 형태다.

초록빛이 짙은 구간을 지나면 나무 그늘 아래로 꽃무릇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의 꽃무릇은 한 지점에만 집중돼 있지 않다. 산책로를 따라 여러 군데에 군락이 이어져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곧게 솟은 붉은 꽃대가 나무 아래를 채우며 숲 바닥에 붉은 융단을 펼쳐 놓은 듯한 장면을 만든다. 군락마다 나무의 배치와 빛이 들어오는 방향, 산책로의 굴곡이 달라 같은 꽃무릇도 서로 다른 분위기로 보인다.

산책로를 앞에 두고 바라보면 꽃무릇 군락이 길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모습이 강조된다. 꽃과 비슷한 높이에서 살펴보면 붉은 꽃밭이 시야를 채우고, 가까이에서는 가늘고 길게 뻗은 꽃술의 형태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만 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반드시 정해진 관찰로 안에서 관람해야 하며 꽃무릇 군락 내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꽃과 잎이 엇갈리는 생태

꽃무릇은 잎이 보이지 않을 때 꽃을 피우는 특징이 있다. 붉은 꽃이 진 뒤에야 잎이 올라오기 때문에 꽃과 잎이 한자리에서 함께 보이지 않는다. 초록 잎 없이 꽃대만 곧게 올라온 모습이 더욱 뚜렷하고 강렬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개화가 절정에 이르는 시기는 9월 말 무렵이다. 당시 관찰된 꽃무릇은 대부분 활짝 핀 상태였으며 개화율은 약 90~100% 수준으로 보였다. 꽃이 피어 있는 기간이 길지 않아 10월 첫 주를 지나면 시든 꽃이 차츰 늘어날 수 있다. 관람 시기와 월요일 휴원 여부를 함께 확인할 필요가 있다.

식물원을 지키는 킹트리

꽃무릇과 함께 놓치지 말아야 할 나무는 식물원에서 가장 큰 낙우송이다. 높이가 약 20m에 이르는 이 나무는 ‘킹트리’ 또는 ‘왕나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굵은 줄기와 높게 뻗은 가지가 주변 숲을 압도한다.

이 낙우송은 기청산식물원을 일군 이삼우 원장이 농사를 시작한 첫해에 모교인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연습림에서 씨앗을 받아 키운 나무다. 1960년대 후반부터 자라기 시작해 5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식물원과 함께했다.

낙우송이라는 이름은 떨어지는 잎의 형태가 새의 깃털을 닮은 데서 비롯됐다. 침엽수지만 가을이 되면 잎이 붉은 갈색으로 물든 뒤 깃털처럼 떨어진다. 꽃무릇이 숲 바닥을 붉게 채우는 초가을과 달리 11월 무렵에는 낙우송의 단풍이 늦가을 풍경을 이룬다.

땅 위로 솟은 호흡근

낙우송 주변에는 짧은 말뚝처럼 생긴 뿌리가 땅 위로 빽빽하게 솟아 있다. 이는 물기가 많은 땅에서 뿌리가 숨을 쉴 수 있도록 지상으로 올라온 호흡근이다. 평범한 나무뿌리와 다른 형태여서 낙우송의 생태를 직접 살펴볼 수 있는 요소다.

우리나라에서 호흡근이 발달한 낙우송을 볼 수 있는 곳은 여러 군데 있지만, 기청산식물원의 낙우송은 웅장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평가받는다. 나무 주변에 모인 호흡근은 수많은 사람이 한곳을 향해 모여 있는 듯한 독특한 장면을 만든다.

붉은 꽃무릇이 초가을의 주인공이라면 거대한 낙우송과 호흡근은 기청산식물원이 쌓아 온 시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풍경이다. 꽃무릇 개화 시기를 지나 방문하더라도 늦가을에는 붉은 갈색으로 물든 낙우송을 중심으로 전혀 다른 계절의 숲을 관찰할 수 있다.

관람할 때 지킬 사항

  • 식물 보호를 위해 지정된 관찰로만 이용해야 한다.
  • 꽃무릇 군락이나 식재 구역 안으로 들어가 촬영해서는 안 된다.
  • 식물원 안에서는 드론 촬영이 허용되지 않는다.
  • 반려동물은 동반할 수 없다.
  • 숲에는 모기가 있을 수 있어 영유아용 기피제 등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기청산식물원 이용 정보

위치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청하면 청하로175번길 50, 청하중학교 인근
3월부터 10월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입장 마감 오후 5시
11월부터 2월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입장 마감 오후 4시
휴원일매주 월요일, 설날 당일, 추석 당일
성인 입장료7,000원
4세부터 18세5,000원
65세 이상 등 할인 대상5,000원
3세 이하무료
주차무료
예상 관람 시간약 40분부터 1시간 30분
시설 문의기청산식물원 054-232-4129

자가용과 대중교통

자가용으로 이동할 때는 기청산식물원을 목적지로 검색하면 된다. 포항 시내에서는 7번 국도를 따라 영덕 방면으로 이동한 뒤 청하 방향으로 진입할 수 있다. 2025년 11월 개통한 포항영덕고속도로 청하 나들목을 이용하는 경로도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KTX 포항역이나 포항터미널에서 보경사 방면 5000번 버스를 타고 청하환승센터에서 내리면 된다. 청하환승센터에서 식물원까지는 걸어서 약 5분 거리다.

인근 청하중학교

식물원 바로 옆에는 청하중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2026년 초 방영된 tvN 드라마 ‘스프링 피버’에서 신수고로 등장했다. 기청산식물원 역시 이 학교 재단의 농장을 관리하던 이삼우 원장이 농원을 세우면서 시작된 곳으로, 두 공간은 오랜 시간 이웃해 왔다.

기청산식물원은 꽃무릇 한 철만을 위한 정원이 아니다. 반세기 넘게 모은 2,500여 종의 식물과 거대한 낙우송, 독특한 호흡근, 자연스러운 숲길이 계절마다 다른 볼거리를 만든다. 초가을에는 꽃무릇이 붉은 길을 열고 늦가을에는 낙우송이 깊은 갈색으로 물들며 숲의 시간을 이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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